"시리즈물도 아닌데 관람 전 준비가 필요한 영화"
영화 <맹크>를 볼지 말지 고민 중인 분들에게 한 마디 하겠다.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이라는 이미 영화를 보았거나 그 영화에 대해 알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보시지 말라고. <시민 케인>은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손꼽히는 영화 중 하나다.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그 명성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래서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으나, 굳이 1941년에 개봉한 흑백영화를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 선택이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만큼 영화 <맹크>는 <시민 케인>과 밀접한 영화다. 그 작품을 쓴 허먼 맹키위츠(Herman J. Mankiewicz)의 집필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히 그 인물에 대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거의 오마주, 혹은 프리퀄인가 싶을 정도로 연출 방식까지 1940년대의 <시민 케인>을 고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과거로 타임슬립 한 것 같은 거친 사운드와, 영화 필름을 이어 붙인 흔적이 화면 구석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명 담배빵(?) 자욱까지...! 그래서 정리하자면, 그 영화에 대한 애정이나 1940년대식 영화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 여러모로 불편한 영화가 바로 이 <맹크>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불친절한 영화"
앞서 밝혔듯 나 역시 <시민 케인>은 보지 않았으며, 영화 속 실존 인물이나 시대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시청했다. 단순히 전설적인 각본가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라 생각했고, 심지어 주인공은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열연하는데다 조연에는 릴리 콜린스, 아만다 사이프리드, 찰스 댄스 등 이름만 대만 알 만한 인물들이 나온다기에 비록 흑백영화지만 보기에 즐거울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나의 예측은 완전히 엇나갔고 덕분에 전반 1시간 정도는 꽤나 괴롭고 답답했다. 어두운 흑백 화면, 낯선 사운드와 거친 연출에 더해, 속사포처럼 끊임없이 대사를 쏟아내는 캐릭터들이 심지어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들이라 그런 걸까? '궁금하면 네가 찾아보든지'같은 느낌으로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스토리는 마구 진행된다. 심지어 <시민 케인>으로 유명해진 '플래시백' 스타일로. 즉, 모르는 이야기가 두 가지나 핑퐁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를 가장 답답하게 만든 요소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무지였다. 1930년대의 미국. 우리나라 1930년대도 기억이 날까말까 한데 그 시절의 미국 이야기를 심지어 '재치 있고', '비꼬는' 습관이 있는 캐릭터들의 대사로 듣자니 참 죽을 맛이었다. 겨우겨우 MGM 영화사가 월급을 삭감하는 내용에서 '아, 대공황이 저때쯤이었지'라는 것과 인물들이 모여서 히틀러를 욕하는 걸 보며 '2차 세계대전이 저때였구나?'를 알아낼 수 있었달까. 그런데 여기에다 영화 속에서 나름 중요한 내용으로 나오는 주지사 선거와 그에 관련된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하면 그저 울고 싶어 진다. 세계사 공부를 게을리하던 상식 없는 나를 탓하며.
두 번째 요소는 실존 인물들에 대한 무지였다. 주인공인 허먼의 존재도 영화를 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으며(여전히 <시민 케인>을 감독 오손 웰스의 작품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더라), 허먼에게 나름 영감(?)을 준 배우 매리언 데이비슨(아만다 사이프리드 역)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스 댄스 역)의 사연도 당연히 모르는 이야기였다. 물론 허스트는 언론사 시간에 잠시 배운 기억은 났지만 그마저도 사업적인 내용이었지 소재가 된 개인사는 낯설었다. 거기다가 등장하는 수 많은 낯선 인물들이 심지어 이름마저 비슷하니(매리언과 메이어, 어빙과 업튼 등) 초반엔 헷갈림으로 정신이 없다. 언급으로만 지나가는 이들도 많은데 심지어 자기들만 아는 애칭이나 별명을 부르는 경우도 있어 정말 힘들었다.
여튼 비주얼적으로, 사운드적으로, 스토리적으로도 정말 쉽지 않은 영화가 바로 이 <맹크>이다. 그래서 혹시 볼 사람이라면 아래 링크를 걸어둔 씨네 21의 인물 소개를 보고 시작하길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www.cine21.com/news/view/?mag_id=96657
[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오슨 웰스, 메리언 데이비스... 실존인물 총정리
허먼 J. 맹키위츠(1897~1953) 허먼 J. 맹키위츠. 사진 제공 EVERETT. 허먼 J. 맹키위츠는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기 전 기자 및 드라마 평론가로 활동했다. ‘뉴욕에서 가장 재밌는 사람’ 소리를 듣던
www.cine21.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봐야한다면?"
정말 불친절한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봐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2시간의 불편함을 결국 견뎌 낸 나에게 묻는다면 두 가지 이유라고 하겠다.
첫 번째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잘 나가는 각본가에서 자칭 '퇴물'이 되기까지의 사연에는 맹크의 개인적인 고뇌가 담겨있다. 당시 주지사 선거 캠페인에서 맹크의 동료 감독이 만든 영상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 권력을 가진 이들의 선호와 애정이 영화계 전체를 쥐고 흔드는 것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이 그렇다. 시대적 배경의 역할이 너무 커서 불만이긴 했지만, 과연 그 어떤 인물이 역사와 동떨어져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세계대전, 사회주의, 대공황, 할리우드의 황금시대(golden age) 등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 무엇을 표현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맹크. 그 결과물이 옳든 그르든 한 사람의 예술가라면 누구나 맹크의 고뇌와 심경이 이해가 되고 영감을 주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모두가 반대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 맹크의 답이 결국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됐다면 더더욱. 그래서 영화 속 그 의미를 함축하여 담고 있는 '오르간 연주자와 원숭이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두 번째는 배우들의 연기다.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일도 없으면서 영화를 보려고 했던 건, 매력적인 흑백 포스터 속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모습이 한 70%였던 것 같다. 그래서 클릭했더니 개리 올드만에 릴리 콜린스까지? 이래서 다들 캐스팅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예상대로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말 훌륭하게 해 낸다.
<레옹>에서 신들린 마약 중독자 경찰 역할로 유명해진 분 답게 알콜 중독의 퇴물 각본가를 완벽하게 연기해 낸 개리 올드만. 그가 극 중 윌리(찰스 댄스 역) 앞에서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장면은 정말 '과연'이라는 탄사가 튀어나오게 만든다. 그리고 별 역할은 아닌 듯하면서도 마치 옛 오드리 헵번을 보는듯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었던 릴리 콜린스도 훌륭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고전적인 줄은 처음 알게 됐다. 여기에 안쓰럽지만 너무도 매력적인 메리언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고급진 악역에 최적화된 찰스 댄스(티리온 아버지)의 합도 정말 좋았다. 이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더더욱 배우 섭외에 공을 들인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로.
"그래서 결론은?"
초중반까지는 정말로 괴로웠지만 그래도 배우들의 열연과 담긴 메시지 덕에 다행히 마무리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광이나 세계사에 빠삭한 누군가가 아니라면 추천은 못 해줄 것 같다. 실제 그 시대의 감성과 연출을 고스란히 담은 고전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도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 같고. 이 영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민 케인>의 프리퀄 영화 같다. <시민 케인>이 지금만큼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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